군대이야기
추억의 군생활
아들이 군대에 갔다. 파주 법원리 모 포병대대 본부포대 측지병 보직을 받았다.
나 역시 병과가 포병이라 군대간 아들을 생각하니 내 군대 생활이 추억으로 다가온다.
78년 8월 박정희 대통시절, 1289@@@@(논산군번)로 군대생활을 하면서 10.26사태
와 12.12사태, 최규하 대통, 그리고 전두환 국보위장(나중에 전통이 됨)등 내 군대생
활은 대통령이 세번이나 바뀐 역사의 현장속에서 살았다. 삼청교육대, 광주민주화운
동(내 군 시절에는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역시 군생활중 일어났다.
의정부 101보충대(지금은 아마 306보충대) 에서 팔려나간 곳은 물 맑고(?) 공기좋은
(?) 강원도 신철원 지포리라는 ***포병대대였고 거기서 또 팔려나간 곳은 내대리라는
알파포대 였다. 태권도가 난무하던시절이라 가자마자 입소식을 같이 팔려간 동기 딱
한명하고 열나게 치고받고(?) 뒹굴면서 치렀다. 거기까진 그래도 참을 만 했는데 90
키로 짜리 포탄을 매고 연병장을 도는 극기훈련(?)까지 받았으니 신고식치곤 거의 유
격 수준이었다.
재수가 없었는지 자대배치 하룬가 이틀만에 최 전방 GOP 지역으로 부대가 이동하는
바람에 온갖 부대 살림살이 이삿짐 다 꾸려 부대에서 기르던 똥개(?)를 안고 5톤 트럭
속에서 먼지 날리며 민통선을 넘었다. 이등병이라서 그런지 그 똥개(지금은 아마 역사
에서 사라졌지만(?) 도 날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한 집안이 이사를 가도 어수선 하고 난리인데 부대가 이동을 했으니 함 상상을 해 보시
라! 부대 주변 울타리를 치고 옹벽을 쌓고 당카를 나르며, 사계 청소 등등, 그야 말로 지
옥이 따로 없을 정도로 이등병의 비애는 비참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 당시에는
당연한 하루 일상이었다.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보직을 받았는데 동기놈은 FDC(사격지휘반) 측각수로, 나는
하나포(1포) 전포로 임무를 받았다. 사실 포반은 사수, 부사수가 중요해서 고참들이 담
당하고 그당시 난 일명 포수(1번포수,2번포수,장약수 등등) 직책을 받았다. 포반장, 사
수, 부사수는 어느 정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만 난 몸으로 때우고 박박 기고 경계 보
초 잘 서고 하면 그만이었다.(물론 그외 부가적인 2등병의 비애는 공통으로 가지면서..).
강원도 철원 지오피의 모기는 그야 말로 강했다. 모기회식에 빤빠라(팬티바람 집합) 하
는 날에는 알철모만 쓰고 풀많은 늡지대에서 부동자세로 팬티만 입고 모기의 가미가제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야만 했고, 추운 겨울에는 얼음판에 엎드려 그 무서운 주전자의
냉수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그래도 뭐가 좋은지 히죽히죽 웃는 병사까지 있었으니 아
마 그 당시 누구나 불평불만이 없었고 모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는 군사독재시절
의 군대였음을 이제 와 새삼 느끼곤 한다. 지금 아마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난리가 나도
큰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느정도의 포반 생활을 하고 일등병인가 할 때 즈음 내 보직이 변경되어 골때리는 보
직을 맞게 되었다. 이름하여 전포대 기록병(전본기록병) 이란 보직인데 이 보직이 전포
대장(중위) 잘 만나면 아주 편한 보직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엄청 스트레스 받는 보직
이다. 지금도 이 보직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신 전본기록병이란 직책이 FDC 소속
으로 있었다. 다시 말하면 전포대장을 보좌(?)(말이 보좌지 사실 따까리다) 하여 훈련이
나 각종 부대 포술 경연대회에서 전포대장 의 여러 임무중 구질구질한 임무를 병이 대신
하는 직책이다.
부대 간부들도 지오피 지역은 영외거주는 커녕, 민간인도 구경 못하는 곳이라서 엄청 스
트레스를 받았는지 항상 병들을 괴롭히는 못된 간부들이 몇몇 있었다. 올챙이 한 마리가
전체 호수를 흐리게 하는 것처럼 꼭 이런 부대 적응 못하는 간부들이 어느 부대 건 있기
마련인가 보다. 병들은 고생되더라도 만기제대 하면 그만이지만 그들은 평생을 군에서
썪어야(?) 한다는 게 그 당시 병들을 괴롭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그만큼 그 시절
군 생활은 고달펐다. 사고치고 말뚝 박은 병사들도 꽤 많았으니...
어찌 됐건 내 보직 변경후 난 그야 말로 전포대장 밑에서 내 나름대로 요령 피워 가며
더도 덜도 아닌 기회주의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내 전본기록병 사수가 제대를 하면
서 내게 남긴 말이 있었는데 군대는 중간만 가면 된다, 잘 할려고도 하지 말고, 그렇다
고 못해서도 안된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해라. 바로 이 말을 명심하며......
사실 내 스타일상 누구 따까리 할 성격이 아니라서 직책에 대해 호감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군대 졸병이 하라면 해야 하는것 아니겠는가~. 대충 일 하다 보니
표가 나는건 당연한 거고 짬밥 경력이 붙다 보니 요령도 생기고 어영부영(?) 하다가 전
포대장 비위에 거슬리면 욕도 얻어먹고 구타도 당했지만 뒤돌아서면 그래도 날 생각해
준 전포대장도 있었다.
대대 사역을 나가거나 민통선 내 농촌모내기 돕기, 등 민간인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
면 먼저 자원해서 어찌됐건 부대밖으로 나가는 게 그리 좋을 수 없었다. 면회는 꿈도 꿀
수 없었고 설상 면회를 온다 해도 대대로 가는 차가 없으면 걸어서 민통선 까지 단독군장
으로 걸어가야 했다. 그러니 아예 면회를 신청하는 군인도 없었다. PX인 경우 대대에서
연락병이 차에 실려 보내는 보름달빵이 최고의 간식이었다.
한탄강, 고석정, 승일교,문혜리, 순담계곡, 직탕폭포 등등 대대주변에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유명 명승지가 많아서 군대 생활 기간중에는 대대에 오는게 그리 좋을수 없었다.
포대에서 대대까지 오는 길은 그야 말로 때 뭍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과 신비가
가득 찬 곳이었다. 전역후 다시는 철원땅을 밟지 않겠다고 했지만...그래도 추억어린 곳이다.
81년 5월 드디어 아무 사고 없이 전역을 하였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남들은 전역시 전
원 집합 상태에서 전역식을 치르고 박수도 받고 하는데 난 동기와 외롭게 부대 야외 훈련장
을 찾아 인사만 하고 전역했다는 사실이다. 지금 와 생각하면 그게 너무 아쉽다. 벌써 제대
한지 27년이 지나고 아들이 포병 병과로 군대 있는거 보면 참으로 세월은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다. 9명의 내 동기들도 보고싶고....
주말엔, 광주포병학교로 아들 면회나 가야 할 것 같다.